지난 주말 가족 나들이로 산에 갔어요. 아직은 온 산이 알록달록 물든 만발의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이제 갓 겨울을 벗어난 무채색의 마른 나뭇가지들 사이로 노랗고 하얀 꽃송이들이 점점이 박힌 듯 피어났어요. 오히려 그만큼 저 작은 생명이 얼마나 힘차게 피어났는지. 주변의 적막함과 대비되는 그 '시작'의 에너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흙 위로 솟은 작은 수선화가 제 눈에는 어찌나 예쁘던지, 형형색색의 꽃으로 덮인 산이었다면 수선화가 눈에 보이기나 했을까요?
수선화
우리는 흔히 힘든 시기를 지나며 내 운이 온 산을 뒤덮은 봄 꽃밭처럼 화려하게 만개할 날을 상상하며 기다리곤 합니다. 그 예상을 빗나갈 때 실망을 하기도 하죠.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단지 ‘개화’의 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조금씩 움트는 씨앗, 꽃망울, 한두 송이의 꽃은 결과가 아니라 아직 과정입니다.
히어리 꽃
개화에는 두 가지 뜻이 있어요.
개화 開花: 꽃을 피우다. 개화 開化: 지혜가 열리고, 깨우쳐 변하다.
음은 같고 뜻은 다르지만, 제게는 이 두 '개화'가 결국 같은 이야기로 들립니다. 무채색의 풍경을 뚫고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찰나가 꽃에게는 치열한 삶의 순간이듯, 우리 또한 어제의 나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매 순간마다 꽃을 피워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화려한 '만개'가 아니라, 단 한 송이를 틔워내는 '개화' 그 자체의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은방울 수선화
최근 피아노 급수 시험을 치른 첫째 아이가 '뿌듯함'이라는 생소한 감정을 배우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잘' 하는 것보다 '끝까지' 해낸 것에서 오는 감정에 대한 체험이었죠. 아이는 동네 곳곳에 하얗게 핀 목련을 보며 "왜 얘만 벌써 피었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감성 육아를 또 한 번 시도해 보았습니다. 아이에게 말했어요.
네가 피아노를 연습하며 견딘 힘든 시간이 겨울이라면, 지금 느끼는 그 뿌듯함이 바로 꽃이야. 목련은 곧 다가올 수많은 꽃들에 대한 기대감 같은 거야. 끝이 아니라 시작인 거지.
아이는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알 것 같아"라며 배시시 웃었습니다.
목련
혹시 지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의 봄을 맞이했나요? 낙담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그저 개화 중일 뿐입니다. 아직 그 순간은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순간은 '화려함'이 아니라 '따스함'으로 올지도 몰라요.